Rookie or doctor

연구노트 쓰기

이번 학기에 대학원에서 필수로 들어야했던 '공통교양' 같은 과목의 많은 부분이

내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실은, 지난 학기도..-_-)

의학, 생명과학, 보건학 계열의 석사, 박사 과정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하는 일종의 옴니버스 수업이라

그 내용을 의미있게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그룹은 강의의 주제에 따라 날마다 다르게 나눠졌을 터였다.

나 역시도 여러번의 강의 가운데 내게 유용하겠다고 생각했던 건 많이 꼽아봐야 세번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중, 연구자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수업이었던가..

연구자에 대한 몇가지 팁/조언 중에서 연구노트를 쓰라는 내용이 있었다.

매일마다 매시간마다 이루어진 과정과 그에 따른 변화를 꼼꼼하게 기록하라는 것.

사례로 주어진 상황은 그야말로 '실험실'에서 행해지는 연구를 하는 경우라서 그게 나에게도 적용가능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걸 최근 깨달으면서 올해 초에 읽었던 '사당동 더하기'가 떠올랐다.

'사당동 더하기'는 사회학자인 필자와 그의 연구원들이 행했던 빈곤에 대한 질적 연구/실험을 기록한 책이다.

그들이 일련의 과정 뿐만 아니라 그날그날의 생각과 느낌을 얼마나 세세하게 기록했는지를 읽으면서

나는 이미 연구노트를 쓰는게 나에게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아차렸어야했다.

 

지금 진행 중인 연구에서도,

처음 연구계획을 세우고, 회사와 노동조합 관계자들을 만나고,

인터뷰어들을 모으고, 그들을 교육했던 과정,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터뷰가 이루어졌던 4주간, 그리고 데이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

그 과정에서 내가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으며 그 때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

차곡차곡 기록해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게 되었다.

(사실 며칠전에 뒤늦게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이제부터라도' 하면 안하는 것보다는 좋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아직도..ㅠㅠ)

 

그래서, 최근 '노동의 배신'에서 필자가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 1시간 정도

매일 꼬박 앉아 그 날 있었던 일들을 가능한 상세히 적었다는 대목을 읽으면서는,

구체적인 이유나 목적에는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그만큼의 품을 들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깊히 공감했다.

 

연구결과를 분석하고 결론을 도출해나가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이 연구는 분명 같은 집단(물론 시간이 꽤 흘렀으니 완전히 똑같진 않겠지만)을 대상으로

6년 전에 우리 기관에서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구 과정과 방법에 관해 교수님 한 분의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워낙 여러 해 전의 일이다보니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거의 도움이 안되었다.

물론 그게 문제가 된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문제될 소지가 없다.

오히려 관성적인 태도를 애초에 견지할 수 없었으니 도움이 되었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당시 연구진들의 실수나 오류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몇가지 지나고보니 아쉬운 점들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6년 전에도 충분히 일어났음직한 상황이라...

그래서 다음번에 이런 방식으로 비슷한 연구를 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번엔 어떤 식으로든 평가를 하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나중에는 평가도 좀 더 구체적인 부분까지 할 수 있을테고 (기억만으로는 한계가 있을테니)

그런 과정에서 경험이 축적되어 다음번에는 더 나은 연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단순히 '보기좋은' 연구 결과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게다가 나름 우여곡절도 있었고)

그 중요한 일에 내가 동참하게 된 이상, 애초에 절실했던 만큼,

이것이 의미있는 변화의 근거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연구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했던 나 스스로도

가장 생생하고 긴밀한 '첫번째' 경험들에 대해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

(아, 이렇게 쓰고 나서 활자를 보니 정말정말 중요한걸 놓쳤다는 생각이!ㅠㅠ)

다소 성긴 기억을 떠올려가며 어떤 식으로든 거칠게나마 기록을 남겨두긴 하겠지만,

어쨌든 후회막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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